2016. 4. 14.

Peggy Guggenheim Collection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3.금세기 화랑)




 
Marguerite Peggy Guggenheim
마거리트 페기 구겐하임
 (1898~1979, aged 81)
 American art collector 











☺ image courtesy 
<Peggy Guggenheim :Art Addict> 
  Documentary ,Official Trailer 2015  












 The Art of This Century Gallery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서 태어난 페기는 
열다섯살이 될때까지 학교에 가지않고
개인교사와 집에서 공부했어요.
그 탓에 친구도 추억도 없지만,
어릴적 예술에 대한 감수성이 풍부했던 
아버지가 많은 그림들을 사들인 것이
이후 페기의 취향에 많은 영향을 준듯해요.















페기의 아버지 Benjamin Guggenheim은
 교양있는 부인을 고용해
가족들에게 예술을 가르치게 했어요.
가족 유럽여행에도 동행시켰는데
루브르나 카르나발레 박물관등을 다니며
교양을 쌓게하는것이 그녀의 의무였죠.



페기는 미남인데다 매력적이며
자상한 아버지를 몹시 좋아했지만,
어릴때부터 여러명의 정부를 두면서
어머니를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고통스러웠고
아버지에게 반항하기도 했어요.




















✏Confessions Of an Art Addict
















1911년 벤자민 구겐하임은 
가족사업을 형제들에게 맡겨둔채, 
파리에서 독자적으로 사업을 벌였어요.
덕분에 파리로 이주하고 삶은 자유로워졌지만,
막대한 재산을 포기한것과 다름 없었죠.


새로 시작한 사업체도
에펠탑의 엘리베이터 시공을 맡긴했지만,
얼마못가 엉망이 되버렸어요. 게다가
이 때문에 파리에 머물다 8개월만에 
귀국하기위해 기차를 예약했는데,
파업으로 운항이 취소되어 대신
문제의 타이타닉호를 타고 오다
결국 사망하게 된거예요.













✏Out of This Century

















 남겨진 페기가족이 아버지의 파리 
사업체에서 건질수 있는건 거의 없었고,
하인 몇명만 데리고 임대료가 
훨씬 싼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됐어요.
어머니는 그림과 보석을 팔았죠.
절대 궁핍하진 않았지만
이때부터 진짜 구겐하임 일가의 사람이 
아니라는 컴플렉스를 갖게 됐어요.
보잘것 없고 가난한 친척이 된듯한 
수치심을 느꼈다고 해요.


4년후 세상을 떠난 외할아버지에게서 
많지않은 재산을 받을수 있었고,
 아버지의 재산은 7년이 흐른후에야 
삼촌들로부터 정산받았어요.
이때 페기의 몫은 4만5천달러였어요.
(부모님 양가 모두 대단한 거부였는데,
가문에 비한다면 보잘것 없는 금액이죠)





























페기는 1919년 성인이 된후에야 
상속받은 큰돈을 손에 쥘수 있었고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34.1 million),
 바로 독립을 했어요.
곧장 전국일주를 떠났어요~
어머니는 매우 언짢아 했지만 
페기를 통제할수는 없었어요.








이후 그녀의 자유분방~ 보헤미안적인 
삶은 워낙 잘 알려져있지만, 
예술에 관해서만은
세상 그 누구보다 진지했어요.
앞서 언급한 마르셀 뒤샹,'조지프 더빈 경'
 'Herbert Read허버트 리드 경'의 
가르침을 적극수용하고,
첫남편인 화가  Laurence Vail 로런스 베일
두번째 남편인 화가  Max Ernst 
막스 에른스트와 예술적 영감을 교류했어요.

(근데 이외에도 과도하게 많은
 예술과들과 교류한것이 알려지면서
남성편력으로 입방아에 오르기도 해요)












그녀가 1938년 처음 문을 연 갤러리는 
런던의 Guggenheim Jeune구겐하임 죈이예요.
20년대부터 알고지내온 연인이자 스승같은 
Marcel Duchamp마르셀 뒤샹을 비롯해, 
많은 친구들이 그녀가 갤러리를 
개관하도록 권유했고, 경영을 도왔어요.


첫전시에 Jean Cocteau장콕토를 
다음엔 Wassily Kandinsky 칸딘스키와
Yves Tanguy이브탕기, Henry Moore 헨리 무어, 
Antoine Pevsner 안톤 페브스너,
 Alexander Calder 알렉산더 칼더, 
Constantin Brâncuși 콘스탄틴 브랑쿠시 , 
Jean Arp 장 아르프 , Max Ernst 막스 에른스트, 
Pablo Picasso 피카소 , Georges Braque 
브라크등의 작품을 선보였어요.


























 장콕토의 작품을 구입한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이후 본인이 진행한 전시에서
 최소 한작품씩은 꼭 사들였어요.
지금이야 모두들 거장이 되었고
작품 가격도 너무 비싸지만, 
당시 현대미술작품은 저렴한편이였어요.





그녀의 컬렉션은 대부분 
영국,프랑스에서 지내던 1938~40년,
미국에서 지내던 1941~46년사이에 
구입한 작품으로,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구축됐어요. 
한 언론 기사에 따르면 총 구입원가는 
25만달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요.


 (대표작만 대충 꼽아도
페르낭레제,브랑쿠시,
브라크,몬드리안 포함하여, 
ten Picassos 피카소10점
eight Mirós 호안미로 8점
 four Magrittes 마그리트4점
three Dalís 달리 3점
one Chagall, one Klee, 
샤갈과 클레 한점씩,
forty Ernsts 남편 에른스트 작품이 
40여점이나 돼요)


1939~40년에는 특히나 
세계2차대전으로 세상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미술관을 열생각으로 마음속에 
“buy a picture a day”란 각오를 다지며,
하루 한작품씩 바쁘게 사들였어요 :)











1940년 또다른 계획을 위해 파리로 향했지만,
 독일군을 피해 1941년 안전한 뉴욕으로 
돌아 갈수밖에 없었어요. 
도착즉시 현대미술관 부지를 물색했고
1942년 57번가에 금세기화랑을 열었어요.




























 The Art of This Century Gallery 
 금세기 화랑
1942-1947
뒤샹 Duchamp - Miles of string exhibition
at 30 West 57th Street in Manhattan.
 Designed by Frederick Kiesler.
 Diorama by Pam Foss.












Frederick Kiesler (Austrian architect)
프레데릭 키슬러(1896~1965)는 빈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귀화한 건축가예요.

화랑을 열만한 57번가 건물꼭대기층을 
발견하고,어떻게 꾸밀지 난감해하던차에
페기는 지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키슬러에게 맡겨보기로 결정했어요.


그녀가 생각하기에 당시 가장 진보적인 
천재 건축가지만 미국에 온지 15년째 
여전히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던 
키슬러는 150cm 작은체구에 
나폴레옹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고 해요.


호화로운 액자없이 그림자체가 
얼마나 멋진지 보여주고 싶었던 페기는, 
그림을 액자같은것에 넣지말라는 
계약조건을 달아 백지수표를 쥐어 주었고,
키슬러는 자신이 만들어낼 혁명적인 화랑은 
오직 작품이 아닌 배경 덕분에
후세에 길이 남을것이라 장담하듯 말했어요.
대충 벽이나 파내어 그림을 끼워넣겠지하는
페기의 예상을 뒤엎고,
키슬러는 훨씬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초현실주의적 전시실을 탄생시켰어요.









Interior view of the abstract gallery









그는 고무나무로 곡선의 벽을 설치하고,
벽에서 30cm거리를 유지하여 
막대 같은것에 얹은 그림을 
어느방향으로든 기울어질수있게 매달아
각 그림마다 전용 조명을 두었어요.
바닥은 청록색으로 칠해졌고,그림과 
조각작품들은 공중에 떠있는듯 느껴졌어요.

빛이 전면으로 들어오는 공간은,
얇은 비단칸막이를 이용해 빛이 
부드럽게 비치도록 했어요.











Frederick J. Kiesler, 1942.
Plywood and Linoleum Rocking Chair 
for Peggy Guggenheim's Art of This Century. 
Frederick Kiesler 
Two Biomorphic Units, 1942.
for Art of This Century Gallery.


Plywood and linoleum 
Height of larger 33 inches, 
width 37 inches, depth 15 inches.


White Unit:Scuffs and wear marks to paint 
surface. Some deep scratches to wood sides.

Black Unit: Veneer chips to edges. 

Minor paint flaking to black paint surface. 

 These two examples are copies of the originals, 
and used in the film Pollock, 2000, 
directed by and starring Ed Harris. 
Est. $1,000-2,000
Sold for $6,250











그리고 키슬러는갤러리를 위해
합판과 다양한색의 리놀륨으로 만든
특별의자를 고안해냈어요.
우선 이것은 흔들의자인데,
조각이나 그림을 놓고 전시할수있고
뒤집으면 탁자로도 쓸수 있었어요.










안타깝지만 키슬러가 초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위해 
예상치보다 너무 많은 비용을 쓴탓에,
나중에 알게된 페기는 한동안 날라오는 
청구서들에 시달리다 키슬러와 
연을 끊어 버렸다고 해요 ^^;









또하나 더 안타까운 일은...
화랑일과 저녁에 여는 파티준비에 빠져 
가정에 소홀히 하면서, 남편 에른스트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많이 하게 됐는데, 
하나는 화가들을 찾아가서 
그림을 차에 싫고 오는 일이였어요. 
남편도 여류화가들에게 관심이 많았는데:D
그중 예쁜 도로시태닝이 자기그림을 
모방한다는걸 알고 무척 우쭐해 했고, 
서로 자주 만나면서 친해지다
결국 눈이 맞게 됐어요. 결국
 페기와 이혼하고 둘이 결혼했어요. 
















 비록 페기에게 몇가지 아픔을 안겨줬지만
금세기 화랑은 미술의 중심지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곳으로 기억되고 있어요.
당시 신진작가에 불과했던 이들이
페기의 후원에 힘입어 상당수
현대미술의 거장이 되었거든요.

대표적으로 스타로 떠오른 
잭슨폴록을 예로 들수있는데,
자서전에 따르면 페기는
43년부터 미국을 떠나는 47년동안
폴록에게 헌신했다고 표현했어요.
(그의 작품을 파는데만 너무 집중한나머지
화랑에 소속된 나머지 화가들을 등한시하게 
되자 많은 이들이 떠나기도 했어요)












갤러리 개관일 밤, 적십자 후원을 위해 
입장권을 1달러에 판매했고, 
수백명이 찾아와 축제분위기였어요.
그날 밤을 페기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어요.

“I wore one of my Tanguy(이브 탕기) earrings 
and one made by Calder(알렉산더 칼더) 
in order to show my impartiality
 between Surrealist and Abstract Art" 


하얀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한쪽에는 탕기가 만들어준 귀걸이를
한쪽에는 칼더가 만들어준 귀걸이를 착용해,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 어느쪽에도 
기울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했어요.






이곳에서 그녀는 그간 수집해온 
소장품(Cubist, abstract and 
Surrealist art)들을 선보였어요. 
(지금은 모두 베니스에 있어요)


catalogue전시도록 제작에도 각별히 신경써
 편집은 앙드레 브레통(edited by André Breton),
표지디자인은 막스에른스트
(cover design by Max Ernst)에게 맡겼어요.   
화랑소식은 신문에도 자주 다루어졌고
매일 수백명의 관람객이 찾았어요.











베네치아로 옮겨가 정착하기위해 
47년 화랑문을 닫을때 키슬러가 
화랑을 꾸미면서 들여놓은 가구와 
디스플레이를 한꺼번 매각했는데,
 순식간에 팔렸어요.  







이후 볼수없게된 금세기화랑을
2008년에 구겐하임 빌바오에서
 미니어쳐로 제작하여 전시한적이 있어요~ 
miniature of 
the Gallery ART OF THE CENTURY.
Guggenheim Museum, Bilbao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