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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 김환기
樹話 金煥基
Kim Whan Ki
樹話 金煥基
Kim Whan Ki
(1913.2.27-1974.7.25)
며칠전 고인이된 수화 김환기의 생신이었어요.
2013년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환기미술관과 MOU를 체결한 네이버는
✏온라인 전시회에 대표작50점을 선보였었죠.
※ 작품소개할때 가능한한 환기미술관
출처의 이미지를 사용하려고 해요.
웹상에 공개된건 한계가 있으니
제가 가진 도록,수필집의 삽화를 덧붙일께요.
아호 나무樹, 말씀話는
특별한 뜻없이 부르고 쓰기 좋은 단어로
호적이름에 새로운맛을 주려 선택한것인데,
하루는 친구가 집에와서 이런말을 했다고 해요.
"자넨 이름과 사는집, 환경이 똑같아!
이리 나무하고 사니,
나무하고 말하고 살수밖에" :)
학자마다 다소 차이가 있는데,
환기미술관측은 그의 예술인생을
아래와 같이 구분하고 있어요.
한국근대회화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김환기의 꽃사슴>과 <오지호의 남향집> 이라
언젠가 꼭 두작품을 함께 소개하고 싶었어요 ^^*
2013년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환기미술관과 MOU를 체결한 네이버는
✏온라인 전시회에 대표작50점을 선보였었죠.
※ 작품소개할때 가능한한 환기미술관
출처의 이미지를 사용하려고 해요.
웹상에 공개된건 한계가 있으니
제가 가진 도록,수필집의 삽화를 덧붙일께요.
아호 나무樹, 말씀話는
특별한 뜻없이 부르고 쓰기 좋은 단어로
호적이름에 새로운맛을 주려 선택한것인데,
하루는 친구가 집에와서 이런말을 했다고 해요.
"자넨 이름과 사는집, 환경이 똑같아!
이리 나무하고 사니,
나무하고 말하고 살수밖에" :)
학자마다 다소 차이가 있는데,
환기미술관측은 그의 예술인생을
아래와 같이 구분하고 있어요.
일본에서 유학하던 동경시대(1933~1937)
고국으로 돌아온 1차 서울시대(1937~1956)
한국의 時情을 노래했던 파리시대(1956~1959)
귀국한 후 2차 서울시대(1959~1963)
마지막 뉴욕시대(1963~1974)
귀국한 후 2차 서울시대(1959~1963)
마지막 뉴욕시대(1963~1974)
한국근대회화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김환기의 꽃사슴>과 <오지호의 남향집> 이라
언젠가 꼭 두작품을 함께 소개하고 싶었어요 ^^*
<꽃사슴> 1958년작 90.9*72.7 cm
캔버스에 유채 / 개인소장
수화 김환기가 친구에게 건낸 선물이었어요.
석남 이경성의 ✏인터뷰 기사에서 발췌할께요.
“하루는 수화가 내 방이 심심하다며
사슴 그림 하나를 줬어요.
그런데 70년대쯤인가, 돈이 너무 궁해
할 수 없이 영국에 사는 한인 여성한테
몇 십만원에 팔았지요.
한참 뒤 그 사람이 그림 수선하러
현대화랑에 가지고 갔더니, 화랑에서
이 그림 팔라고 하더래. 누가 4억원에 산다고.
그래서 팔고는 나한테 3000만원을 가져왔어요.
고맙다고... ”
미술평론가 석남(石南) 이경성은
前국립미술관장이자 김환기의 삶과예술을 다룬
'✏내가 그린점 하늘끝에 갔을까'의 저자예요.
두분은 평생 그림과 글을 주고받던 벗이었어요.
이 일화를 듣고나니 우정이 담긴 '사슴'이
더 앙증맞고 사랑스러워요.
한편으로 가슴이 찡하지만
새로운 주인을 만나 귀염받고 있겠죠.
사슴은 소장자가 대여해준 덕분에
2006년 환기미술관에서 개최된
"우정의 가교 김환기.이경성 展"에 선보였어요.
(오늘은 사슴 얘기만 하다보니
혹여 왜곡된 이미지로 받아들이실 수
있으니 미리 언급할까봐요. 수화 김환기는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할것 같소"라 말하던
▷키가 크고 호탕한 참다운 자유인
▷학의 모습을 닮은 선비같은 멋쟁이
▷그림도 좋지만 문장도 잘쓰는 멋쟁이
로 기억되고 있어요)
수화 김환기는 전남 신안군 기좌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대자연 앞에 가슴을 열어
자연을 호흡하고 자연과 나눈 교감이
예술의 원천이 되었죠.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도
(이미지 출처:영상물 한국기행 남도예술기행)
사슴은 영원을 상징하는 십장생과
함께 자주 다루어진 소재예요.
직접 가보진 못해 아쉽지만,,
고인을 그리워하는 흔적들이
고향마을 곳곳에 남아 있어요.
(전 목빼고 망원경을 들고 있는 사슴이
명랑해서 젤 좋아요~)
수화 김환기의 수필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새 책을 볼때면 처음보는 사슴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요.
어디 숨어있나 먼저 훑어봐요:)
따뜻함이 가득한 친구였지,
수화는 그림도 잘줬어.
한번은 내가 애지중지하던
담배파이프를 갖고 농을 한뒤
미안했던지 사인이 없는 그림을 주더군.
그래서 내가 사인이 없다고 하자
사인없어도 내그림 맞다며 웃곤했어.
호탕하고 자신감있고 인정넘치는 친구였지.
수화는 그런사람 이었어.
- 시인 조병화
(이미지 출처: 영상물 )
수화 김환기는 1941~47년사이 중단기를 가져요.
일본에서 귀국후 전쟁의 격동기를 체험하며
예술적 정신적 방황을 겪지 않았나 짐작돼요.
44년 이혼 후, 46년 향안과 재혼을 해요.
영원한 마음의 고향 기좌도에 머물며
미술가,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47년 유영국,이규상과 '신사실파'를 결성하며
다시 창작의 활기를 되찾아요.
김향안 여사는 시인 이상李箱의
마지막을 함께한 여인이었어요.
(이상은 결혼 3달후 요절했어요)
이후 수화 김환기와 결혼한거예요.
한국사에 천재라 불리우는 두남자의 뮤즈였다니
범상치 않은 분이었음이 느껴지죠.
그녀는 수화 김환기를 위해 물심양면
돕는 아내이자 비서,통역사였어요.
✏환기미술관은 수필가 아내 김향안 여사가
유작을 영구보전하기 위해 1992년
서울 부암동에 설립한 사립미술관이예요.
수화 김환기의 수필집에서 발췌했어요.
"아내는 낙천가이다. 나는 아내에게 하숙하고
있는 셈이다. 참 아내를 혹사한 것이다.
돈을 못벌어 오는데도 아무 소리가 없다.
먹을것이 없어도 명랑하고...
능금을 좋아하는데, 몇알 사들고 와서
손에 쥐어주면 어린애같이 좋아한다.
소설을 쓰고 싶은 모양인데
나때문에 못쓰는걸 안다.
그림을 못그릴때면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린다.
아내는 피카소를 존경하고 이해도 깊다.
그를 안하무인의 화가란다.
세상이 좋아지면 아내를 내세워
그림여행을 자주 할생각이다.
밉든 곱든간에 우리는 반생을
강아지처럼 살아왔다."
언젠가 파리에 데리고 가겠다고 했더니
그녀는 금새 불어책을 사와서는
피난길에도 손에 놓질 않았다고 해요.
1955년 수화김환기보다 1년앞서 파리로 갔고,
이미 불어를 어느정도 마스터한 상태였어요.
먼저 자리를 잡아 남편이 창작활동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애썼다고 해요.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을 듣던 환기미술관에
2008년부터 내분이 일기 시작했어요.
✏소송 잡음에 휩싸인 환기미술관 지하의 거장이 목놓아 통곡할라
발단은 미국에 거주하던 재단 이사장(아들)이
현 미술관 관장을 상대로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부터예요.
더불어 미술관장과 재단이사가
아버지의 작품을 임의로 내다팔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어요.
김향안 여사는 생전 남편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리기 위해
미술관 운영과 기획전시,
출판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어요.
남의 송사에 관심갖기 싫은데...
안타까운점은 미술관의 공식적 작품리스트가
92년 설립당시 미술관 등록재산으로
신고한 130여점뿐이라고 해요.
김향안 여사는 전 작품을 꿰고 있었다지만
그녀 사후에 3명의 관장이 바뀌는동안
누구도 보유작품 목록을 작성하지 않아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건 불가능할 듯해요.
김향안여사와 이사장이 뉴욕에서도
드로잉북을 수십권보냈다고 하니
환기미술관은 대략 유화 500여점
드로잉 300여점이상을 소장하고 있어요.
이사장은 이사회결의로 해임되었고
양측간 고소고발은 계속되고 있어요.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고,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과 감사결과
(증거확보에 애를 먹고 있지만)
최초130점중 5점은 없는것으로 확인됐어요.
파행운영 기간동안 환기미술관 작품관리는
국립미술관이 위탁관리하게 되었어요.
수장고 보완관리를 강화하는 한편
작품의 외부반출및 대여사용이 금지됐고
소장품 목록을 작성하기로 했어요.
<영원의 노래>
1956년 캔버스에 유채 50 x 100 cm
너무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예요.
사람은 가도 작품은 남기를 바랍니다..
캔버스에 유채 / 개인소장
수화 김환기가 친구에게 건낸 선물이었어요.
석남 이경성의 ✏인터뷰 기사에서 발췌할께요.
“하루는 수화가 내 방이 심심하다며
사슴 그림 하나를 줬어요.
그런데 70년대쯤인가, 돈이 너무 궁해
할 수 없이 영국에 사는 한인 여성한테
몇 십만원에 팔았지요.
한참 뒤 그 사람이 그림 수선하러
현대화랑에 가지고 갔더니, 화랑에서
이 그림 팔라고 하더래. 누가 4억원에 산다고.
그래서 팔고는 나한테 3000만원을 가져왔어요.
고맙다고... ”
미술평론가 석남(石南) 이경성은
前국립미술관장이자 김환기의 삶과예술을 다룬
'✏내가 그린점 하늘끝에 갔을까'의 저자예요.
두분은 평생 그림과 글을 주고받던 벗이었어요.
이 일화를 듣고나니 우정이 담긴 '사슴'이
더 앙증맞고 사랑스러워요.
한편으로 가슴이 찡하지만
새로운 주인을 만나 귀염받고 있겠죠.
사슴은 소장자가 대여해준 덕분에
2006년 환기미술관에서 개최된
"우정의 가교 김환기.이경성 展"에 선보였어요.
(오늘은 사슴 얘기만 하다보니
혹여 왜곡된 이미지로 받아들이실 수
있으니 미리 언급할까봐요. 수화 김환기는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할것 같소"라 말하던
▷키가 크고 호탕한 참다운 자유인
▷학의 모습을 닮은 선비같은 멋쟁이
▷그림도 좋지만 문장도 잘쓰는 멋쟁이
로 기억되고 있어요)
수화 김환기는 전남 신안군 기좌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대자연 앞에 가슴을 열어
자연을 호흡하고 자연과 나눈 교감이
예술의 원천이 되었죠.
(이미지 출처:영상물 한국기행 남도예술기행)
무심코 술집에서
"어째 그리 목이 길어요?" 했더니
"나는 섬에서 났단 말이야,
어려서 어찌나 육지가 그리웠는지
큰 배가 부엉~하고 멀리 지나가면
미칠것만 같았어. 그때마다 발돋움하고
목을 길게 뺏더니 이리 목이 길어졌어."
하곤 술집이 떠나갈듯 웃어댔어.
수화는 이렇게 유머가 풍부한 큰 어린이였지..
-시인 조병화
무심코 술집에서
"어째 그리 목이 길어요?" 했더니
"나는 섬에서 났단 말이야,
어려서 어찌나 육지가 그리웠는지
큰 배가 부엉~하고 멀리 지나가면
미칠것만 같았어. 그때마다 발돋움하고
목을 길게 뺏더니 이리 목이 길어졌어."
하곤 술집이 떠나갈듯 웃어댔어.
수화는 이렇게 유머가 풍부한 큰 어린이였지..
-시인 조병화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도
(이미지 출처:영상물 한국기행 남도예술기행)
사슴은 영원을 상징하는 십장생과
함께 자주 다루어진 소재예요.
직접 가보진 못해 아쉽지만,,
고인을 그리워하는 흔적들이
고향마을 곳곳에 남아 있어요.
(전 목빼고 망원경을 들고 있는 사슴이
명랑해서 젤 좋아요~)
수화 김환기의 수필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새 책을 볼때면 처음보는 사슴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요.
어디 숨어있나 먼저 훑어봐요:)
따뜻함이 가득한 친구였지,
수화는 그림도 잘줬어.
한번은 내가 애지중지하던
담배파이프를 갖고 농을 한뒤
미안했던지 사인이 없는 그림을 주더군.
그래서 내가 사인이 없다고 하자
사인없어도 내그림 맞다며 웃곤했어.
호탕하고 자신감있고 인정넘치는 친구였지.
수화는 그런사람 이었어.
- 시인 조병화
(이미지 출처: 영상물 )
수화 김환기는 1941~47년사이 중단기를 가져요.
일본에서 귀국후 전쟁의 격동기를 체험하며
예술적 정신적 방황을 겪지 않았나 짐작돼요.
44년 이혼 후, 46년 향안과 재혼을 해요.
영원한 마음의 고향 기좌도에 머물며
미술가,문인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47년 유영국,이규상과 '신사실파'를 결성하며
다시 창작의 활기를 되찾아요.
김향안 여사는 시인 이상李箱의
마지막을 함께한 여인이었어요.
(이상은 결혼 3달후 요절했어요)
이후 수화 김환기와 결혼한거예요.
한국사에 천재라 불리우는 두남자의 뮤즈였다니
범상치 않은 분이었음이 느껴지죠.
그녀는 수화 김환기를 위해 물심양면
돕는 아내이자 비서,통역사였어요.
✏환기미술관은 수필가 아내 김향안 여사가
유작을 영구보전하기 위해 1992년
서울 부암동에 설립한 사립미술관이예요.
수화 김환기의 수필집에서 발췌했어요.
"아내는 낙천가이다. 나는 아내에게 하숙하고
있는 셈이다. 참 아내를 혹사한 것이다.
돈을 못벌어 오는데도 아무 소리가 없다.
먹을것이 없어도 명랑하고...
능금을 좋아하는데, 몇알 사들고 와서
손에 쥐어주면 어린애같이 좋아한다.
소설을 쓰고 싶은 모양인데
나때문에 못쓰는걸 안다.
그림을 못그릴때면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린다.
아내는 피카소를 존경하고 이해도 깊다.
그를 안하무인의 화가란다.
세상이 좋아지면 아내를 내세워
그림여행을 자주 할생각이다.
밉든 곱든간에 우리는 반생을
강아지처럼 살아왔다."
언젠가 파리에 데리고 가겠다고 했더니
그녀는 금새 불어책을 사와서는
피난길에도 손에 놓질 않았다고 해요.
1955년 수화김환기보다 1년앞서 파리로 갔고,
이미 불어를 어느정도 마스터한 상태였어요.
먼저 자리를 잡아 남편이 창작활동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애썼다고 해요.
<영원의 노래>
1957년 캔버스에 유채 162 x 130 cm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을 듣던 환기미술관에
2008년부터 내분이 일기 시작했어요.
✏소송 잡음에 휩싸인 환기미술관 지하의 거장이 목놓아 통곡할라
발단은 미국에 거주하던 재단 이사장(아들)이
현 미술관 관장을 상대로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부터예요.
더불어 미술관장과 재단이사가
아버지의 작품을 임의로 내다팔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어요.
김향안 여사는 생전 남편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리기 위해
미술관 운영과 기획전시,
출판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어요.
남의 송사에 관심갖기 싫은데...
안타까운점은 미술관의 공식적 작품리스트가
92년 설립당시 미술관 등록재산으로
신고한 130여점뿐이라고 해요.
김향안 여사는 전 작품을 꿰고 있었다지만
그녀 사후에 3명의 관장이 바뀌는동안
누구도 보유작품 목록을 작성하지 않아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건 불가능할 듯해요.
김향안여사와 이사장이 뉴욕에서도
드로잉북을 수십권보냈다고 하니
환기미술관은 대략 유화 500여점
드로잉 300여점이상을 소장하고 있어요.
이사장은 이사회결의로 해임되었고
양측간 고소고발은 계속되고 있어요.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고,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과 감사결과
(증거확보에 애를 먹고 있지만)
최초130점중 5점은 없는것으로 확인됐어요.
파행운영 기간동안 환기미술관 작품관리는
국립미술관이 위탁관리하게 되었어요.
수장고 보완관리를 강화하는 한편
작품의 외부반출및 대여사용이 금지됐고
소장품 목록을 작성하기로 했어요.
<영원의 노래>
1956년 캔버스에 유채 50 x 100 cm
너무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예요.
사람은 가도 작품은 남기를 바랍니다..
<남향집, 1939>
오지호(1905-1982)
캔버스에 유채, 80 x 65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그림을 처음봤을때 맘속으로
순이와 멍뭉이로 이름지어줬었는데
실제 금희와 삽살이네요 :)
*
'개성은 고려의 수도. 고도의 풍모와 독특한
자연을 가지고 있어 오지호를 매료시켰다.
개성시대만큼 평화롭고 그림에
몰두한시기는 없었다고 말할정도이다.
만주여행을 통해 광활한 대자연을 흠뻑느끼고..
인상주의화풍을 발전시키는데 큰도움이됐다.
오지호는 만주여행당시 위궤양을
크게앓아 극단적 단식을 통해 극복했는데
남향집은 이때 완성된 작품이다.
태양이 빛을 발하는
오후의 일상을 극명하게 그려냈다.
둘째딸 금희가 문뒤에 수줍게 서있고
한가롭게 집에서 기르던
애견 삽살이가 졸고있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작가의 개성시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귀한작품이다.
청색보라로 처리된 나무그림자와 축대그늘에서
특히 인상주의 미학의 완성을 볼수있다.
색채로 표현된 그늘, 맑은공기와 투명한 빛으로
구사한 밝고 명랑한 색조및 자연미의 재인식은
프랑스 인상주의미학과 공통되는것이다.
청색 노랑등 향토색 짙은색채는
훗날 호남지역화가들이 즐겨사용한 색감이다.
인상주의 빛의효과를 우리민족 고유감성으로
전이시켜 우리자연에 맞는방법으로
일관해 온 작가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한국근대미술을 빛낸 그림들
(저자 정준모)에서 발췌했어요.
*
김환기 2편은 항아리얘기로 이어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