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10.

傅抱石 Fu Baoshi 푸바오스 (1. 生涯)


傅抱石 Fu Baoshi 
푸바오스 1904-1965

  <南京博物院藏,纽约大都会艺术馆展>


 中文名 : 傅抱石
别名 : 长生(본명) , 瑞麟[ruìlín]
号称(자칭,타칭:) - 抱石斋主人 / 印痴
画派(화파) : 新金陵画派


할아버지代부터 몰락하여 머슴살이를 했고...
우산 수선일로 겨우 연명하던 아버지(31세)와
16살어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傅抱石.
부모님사이 금슬이 좋아 7자녀가 태어났지만
장녀와 막내 傅抱石를  빼곤 모두 사망했어요.
막내도 요절할까 두려워서 오래살라고
이름을 长生이라 지었다고 해요.


瑞麟[ruìlín]이란 이름은 13살무렵
그를 아끼는 마음에 학비도 안받고
학교에서 수업을 받도록 해준 
교장선생님이 붙여주신 학명이예요.


세월히 흘러 石濤의 그림을 무척 좋아하는
마음에  號를 자칭 抱石斋主人라 부르다가
  아예 이름을 傅抱石로 바꿨어요.


印痴(인치;인장을새기는 바보)는
어릴때부터 밥벌이 수단이자,
워낙 좋아해서 피곤한줄 모르고 즐겨하던
 일이라 스스로 낮춰부른 별명이예요.









金陵画派(New Jinling school)
    中国画坛最具影响力的绘画流派之一。

金陵(금릉)은 南京(남경)의 옛이름이예요.
20년대말-30년대초  吕凤子、徐悲鸿、张大千
颜文梁、吕斯百、陈之佛、高剑父、潘玉良、
庞薰琹등 저명한 화가들이 南京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금릉학파로 불리게 되었어요.
중국미술계를  대표하는 유파예요.

60년대에 이르러 傅抱石、钱松喦、张文俊、
亚明、宋文治、魏紫熙등의 화가들이
 이를 더욱 계승발전시켰어요.








1932年作  135.2*54cm





 生涯 생애

1904년 남창
출생(出生于江西省南昌)인
푸바오스는 6살때 이웃 경찰아저씨에게서 
글을 배웠어요. 한달만에 더이상 가르칠 
글자가 없을만큼 영리했어요. 
1911년 청강생으로 다니던 서당에서 쫒겨나고
1915년 자기가게(瓷器店)에서 일하다 
쫒겨나는등 어린나이에 수난을 겪었지만, 
앞서말한 교장선생님의 도움으로 1917년 
소학교에 편입해 학업을 이어나갈수 있었어요.



1922년 18살때 생계의 압박에 못이겨 청나라
 趙之謙(조지겸)의 인장을 위조해서 팔았어요.
손재주가 워낙 뛰어나 찾는사람이 많았어요.
드디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난데다, 위조사실이
 드러났지만 오히려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됐어요.
 즉 유명화가의 그림을 模作(모작)하거나
가짜인장을 주문받는 일을 그만두고, 개명한
 본인이름(抱石)을 사용하기 시작한거예요.







1926년 졸업후 학교에 남아 강의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여러권의 책도 저술했어요.
1930년 26살때  예술과 학생 羅時慧와
결혼하여, 1932년 아들 小石이 태어났어요.
이즈음 徐悲鸿의 소개로 만난 省의 주석이 
힘써준덕에 일본 유학을 가게 돼요.

1933년 동경 일본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해
 저명한 학자 긴바라 세이코에게 사사(師事)하고 
동양미술사를 전공하고, 공예,조각도 배웠어요.
(赴日本留学,入东京帝国美术学校研究部,
攻读东方美术吏,兼习工艺、雕刻.)


1934년 30살때 동경에서 무려 170여점의 
서화와 전각(篆刻)으로 개인전을 가졌어요.
호평을 받고 저명인사들과 교류하던 중,
어머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서둘러 귀국했고..
이내 장례를 치루면서 일본유학을 포기해요.

이때 차마 가져오지 못하고 남겨둔 많은 

초기 작품(그림과 서예)들이
현재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소장돼있어요.

대부분 스승 긴바라 세이코가 기증한 거예요.




고국에 남기로 결심한 
1935년부터  
예술교육과 미술사 강의를 시작했어요.
비록 정식졸업장도 못받고 돌아왔지만, 
 徐悲鸿이 남경 중앙대학에 강사로 초빙했어요.
이듬해 둘째아들 二石가 태어났어요.
1936년 서화100여점으로 개인전을
열고, 
다수의 일본미술서적을 번역했어요.


1937년 남경대학살 당시 가족을 피신시키고

홀로 안휘성 宣城선성으로 향했어요.
이곳은 당나라 시인 李白이백이 풍류를 즐기고, 
명나라 선성파의 수장 梅淸이 은거했으며,
石濤가 함께 산수를 유람하며 
 매청의 가르침을 
구했던 곳이예요. 그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육조시대의 회화'등 글을 많이 남겼어요.


대일항전이 계속되던 중 가족과 재회하고 

이내 1940년, 맏딸 益珊이 태어났어요.
중앙대학 교수직을 맡아 예술사연구에 몰두한 
한편 회화연구를 통해 화풍에 큰 발전을 보여요.
 불빛이 없어 대문밖에 나가 그림을 그릴정도로 
형편이 매우 궁핍하였지만  100여점의 작품을 
창작해 1942년 개인전을 가졌어요.
1943년 중경/성도에서 <굴원屈原> <도연명상>, 
 徐悲鸿이 극찬한 <대척초당도 大滌草堂圖>등의
 명작을 선보이며 개인전을 치뤘어요.






1944년 둘째딸 益璇이 태어났어요. 

중경, 昆明에서 개인전을 갖고, 민주운동에 
참가한 1945년 <호계삼소虎溪三笑>를 그렸어요.

1946년은
 중경에 있던 중앙대학이 남경으로 
이전된 해예요.   徐悲鸿 ,呂斯百,陈之佛와 
연합전시회를 열었어요. 셋째딸이 태어난 
1947년은  180여폭의 작품으로 
상해 중국畵苑원에서 傅抱石畵展을 가졌어요.




1950년 모택동毛澤東이 쓴 詩詞를 
작품제목으로 쓰기 시작해요.
1952년 남경사범학원 교수로 임용된후

중국회화관련 중요저서를 잇따라 출간하고,
1953년 전국1회 國畵展국화전에 참가해요.

1957년 남경국화원 주요책임자로서 화가
대표단을 이끌고 루마니아, 체코를 방문한 후 
남긴 50여점의 그림을 화집으로 출판했어요.

1959년 북경 인민대회당에  大作산수화 

<江山如此多矯>를 내걸었어요.
이때 모택동이 직접 제목을 썼다고 해요:)






1960년 강소성 국화원 원장으로 취임, 

남경사법학원 교수를 겸임, 
중국미술가협회 江蘇分會 주석으로 당선, 
중국미술가협회 부주석에 당선돼요.
강소성화가들과 사생여행을 통해 남긴 
그림으로 화집 <山河新貌산하신모>를 출판하고
同名의 전시회를 북경에서 열었어요.

1963년 남경 漢口路의 고급별장으로 
이사하는데 이곳이 생의 마지막을 
보낸곳이며, 현재 傅抱石기념관이 됐어요.

이듬해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고 
1965년 1월 전국미전에 출품,  
9월 상해  虹橋홍교국제공항 건설을 기념한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특별초청을 받아 상해에 
도착해 인사들, 화가동료들과 연회를 가진후,  
명절을 보내러  漢口路에 잠시 들렀다가
갑자기 뇌일혈로 자택에서 사망하여..
남경 공원묘지에 안장됐어요. 







1933年作  184.2*63.5cm


푸바오스에게 처음 성공을 안겨다준것은 
인장을 새기는 전각예술이였고,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도 많이그렸는데
그중에서 미술사적으로 산수화가 
중국 예술에 미친영향이 가장 커요.



학자들은 그의 산수화와 관련하여 화풍의
변화를 보이는 시기를 6가지로 나누고 있어요.
1) 이름까지 바꿀정도로 선대화가
抱石에 너무 깊이빠져있던 어린시절
2)처음 유학을 떠나 일본화가의
화법을 연구하던 1932-35년.
3)이르는 곳마다 기이하고 웅장한 산세가
 뿜어내는 오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천(蜀촉지방)에  머물던 8년 (1940`s) .
4)남경사범학원 시절 (1950`s)
5)강소성 국화원 책임직에 있던 1960년대
6) 여유롭고 원만하고 윤택하면서도
굳건한 화풍을 완성한 만년.




특정지역을 사생했던 시기까지
포함하여 조금더 세분하기도 해요.

早期作品 :1937년전
金刚坡时期作品 : 1939-1946
 求索十余年时期作品 :1946春 -1956秋
 欧洲유럽写生 :(转折点전환점)
 "文艺大跃进" 中 "傅卫星" 作品: 1958-1959
建国十周年催生宏巨制:1959
饥荒夕月的写生长征 :1960
东北写生作品 :1961
大师晚期作品: 1962-1965
(*각 시기별특징은 작품감상때 볼께요)






<观画图(读书图)>
1943年作  110*62.2cm
<拟云林洗马图>
1943年作  60.6*109.3cm

<▶云台山图>
1941年作 31*112cm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