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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ia O'Keeffe
조지아 오키프
( American ㅣ1887–1986ㅣaged 98)
Movement: American modernism
Education: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Columbia University/ University of Virginia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
Education: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Columbia University/ University of Virginia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
她以半抽象半写实的手法闻名,
其主题相当具有特色,多为花朵微观
、岩石肌理变化,海螺、动物骨头、
荒凉的美国内陆景观为主.
[chōuxiàng] 추상적이다.
写实[xiěshí] 사실, 있는그대로 묘사하다
闻名[wénmíng] 유명하다.명성을듣다.
岩石[yánshí] 암석. 바위.
海螺[hǎiluó]소라.소라껍질.
动物 [dòngwù]동물/ 骨头 [gǔtou]뼈
荒凉[huāngliáng] 황량하다. 쓸쓸하다.
内陆[nèilù]내륙/ 景观[jǐngguān] 경관,경치
●青少年时期
父亲Francis Calyxtus O'Keeffe 和
母亲Ida Totto O'Keeffe经营乳牛场为生。
全家有七位兄弟姐妹,欧姬芙排行第二。
欧姬芙在威斯康辛州长大,就读市政厅学校,
并跟当地的水彩画家莎拉·曼尔学画。
随后她到麦迪逊市就读高中(1901年到1903年).
1903年欧姬芙转学到维吉尼亚的
崔顿主教学院,1905年高中毕业。
●大学之后
大学时,欧姬芙选择芝加哥艺术学院,
2年后她转去纽约市参加艺术学生联盟。
1908年她师事画家威廉·马里特·切斯.
并以油画“无题”赢得艺术学生联盟
中的威廉·马里特·切斯奖。
此画作“无题”画得是一只死亡的兔子与铜罐。
此奖也将欧姬芙送到纽约上州的乔治湖区,
参加艺术学生联盟的夏令学校。
1908年,欧姬芙到纽约291画廊观赏雕塑家
罗丹的水彩画展时,遇到她未来的先生,
也就是画廊主人兼摄影家,
阿尔弗雷德·史蒂格利兹.
芝加哥艺术学院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1915年,欧姬芙转去南卡罗莱纳州的
哥伦比亚学院教书. 1916年,为了要在
西德州州立大学谋得教授一职,
她曾短暂回去纽约继续未完的教师学院课程。
南卡罗莱纳州=South Carolina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哥伦比亚学院=Columbia University
教授[jiàoshòu] 교수.가르치다.
这一年可说是欧姬芙真正找到自己画风的
一个关键时期,一年前她在南卡罗莱纳州时,
试着用炭笔绘出一系列抽象的主题,
并寄给纽约的朋友安妮塔·普力兹分享。
安妮塔相当喜爱这系列画作,
遂将作品拿给291画廊的史蒂格利兹看,
他发现了欧姬芙的绘画天份,
当下决定要将这系列画作展出,
1916年的5月,十幅欧姬芙的炭笔画
在291画廊以团体展的一部份正式展出
(据称当时史蒂格利兹并未通知欧姬芙,
是展出之后安妮塔才告知欧姬芙)。
炭笔[tànbǐ] 소묘용 목탄.
1917年,由于第一展出的评价不错,
史蒂格利兹又替欧姬芙办了两次个展。
1917年欧姬芙教了几年书之后,身体状况
不太好,她申请了长假,搬到气候温暖的
德州圣安东尼奥市,
并开始和史蒂格利兹有书信往来,透过书写,
他们逐渐产生感情,于是在1918年5月,欧姬芙
接受史蒂格利兹的邀请,在6月搬到纽约。
产生[chǎnshēng]/ 感情[gǎnqíng]
감정이 싹트다. 정이 들다
其主题相当具有特色,多为花朵微观
、岩石肌理变化,海螺、动物骨头、
荒凉的美国内陆景观为主.
[chōuxiàng] 추상적이다.
写实[xiěshí] 사실, 있는그대로 묘사하다
闻名[wénmíng] 유명하다.명성을듣다.
岩石[yánshí] 암석. 바위.
海螺[hǎiluó]소라.소라껍질.
动物 [dòngwù]동물/ 骨头 [gǔtou]뼈
荒凉[huāngliáng] 황량하다. 쓸쓸하다.
内陆[nèilù]내륙/ 景观[jǐngguān] 경관,경치
●青少年时期
父亲Francis Calyxtus O'Keeffe 和
母亲Ida Totto O'Keeffe经营乳牛场为生。
全家有七位兄弟姐妹,欧姬芙排行第二。
欧姬芙在威斯康辛州长大,就读市政厅学校,
并跟当地的水彩画家莎拉·曼尔学画。
随后她到麦迪逊市就读高中(1901年到1903年).
1903年欧姬芙转学到维吉尼亚的
崔顿主教学院,1905年高中毕业。
乳牛场[rǔniúchǎng] 낙농장
莎拉·曼尔= Sarah Mann
莎拉·曼尔= Sarah Mann
威斯康辛州= Wisconsin, United States
维吉尼亚=Virginia
水彩画家[shuǐcǎihuàjiā] 수채화가.
●大学之后
大学时,欧姬芙选择芝加哥艺术学院,
2年后她转去纽约市参加艺术学生联盟。
1908年她师事画家威廉·马里特·切斯.
并以油画“无题”赢得艺术学生联盟
中的威廉·马里特·切斯奖。
此画作“无题”画得是一只死亡的兔子与铜罐。
此奖也将欧姬芙送到纽约上州的乔治湖区,
参加艺术学生联盟的夏令学校。
1908年,欧姬芙到纽约291画廊观赏雕塑家
罗丹的水彩画展时,遇到她未来的先生,
也就是画廊主人兼摄影家,
阿尔弗雷德·史蒂格利兹.
芝加哥艺术学院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威廉·马里特·切斯=William Merritt Chase
윌리엄 메릿 체이스(1849-1916)
赢得[yíngdé] 얻다. 획득하다.수여받다
阿尔弗雷德·史蒂格利兹=Alfred Stieglitz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1864–1946)
1915年,欧姬芙转去南卡罗莱纳州的
哥伦比亚学院教书. 1916年,为了要在
西德州州立大学谋得教授一职,
她曾短暂回去纽约继续未完的教师学院课程。
南卡罗莱纳州=South Carolina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哥伦比亚学院=Columbia University
教授[jiàoshòu] 교수.가르치다.
这一年可说是欧姬芙真正找到自己画风的
一个关键时期,一年前她在南卡罗莱纳州时,
试着用炭笔绘出一系列抽象的主题,
并寄给纽约的朋友安妮塔·普力兹分享。
安妮塔相当喜爱这系列画作,
遂将作品拿给291画廊的史蒂格利兹看,
他发现了欧姬芙的绘画天份,
当下决定要将这系列画作展出,
1916年的5月,十幅欧姬芙的炭笔画
在291画廊以团体展的一部份正式展出
(据称当时史蒂格利兹并未通知欧姬芙,
是展出之后安妮塔才告知欧姬芙)。
炭笔[tànbǐ] 소묘용 목탄.
1917年,由于第一展出的评价不错,
史蒂格利兹又替欧姬芙办了两次个展。
1917年欧姬芙教了几年书之后,身体状况
不太好,她申请了长假,搬到气候温暖的
德州圣安东尼奥市,
并开始和史蒂格利兹有书信往来,透过书写,
他们逐渐产生感情,于是在1918年5月,欧姬芙
接受史蒂格利兹的邀请,在6月搬到纽约。
감정이 싹트다. 정이 들다
LETTER FROM GEORGIA O’KEEFFE
TO ALFRED STIEGLITZ, 1943-04-30
LETTER FROM GEORGIA O’KEEFFE
BUFFALO SKULL
어릴때부터 조지아는 꽃, 나무, 돌, 산, 호수,
바다등 자연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었어요.
부모님이 소유한 수십만평의 비옥한 농지에는
봄, 여름이면 야생화가 만개하고,
루비처럼 붉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초록물결 넘실거리는 들판을 수놓았어요.
가을이 지나 폭설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
지평선 끝까지 하얀눈이 소복히 쌓였어요.
몇시간씩이나 흙길을 돌아다녔고
밤이면 침대에 누워 창문너머 펼쳐진
드넓은 하늘을 보다 잠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조지아는 일생동안 갇혀
지내는걸 싫어했어요. 30여년간 동해안을,
다음 50여년은 뉴멕시코 곳곳을 걷고,
또 말과 차를 타고 누볐어요.
그녀의 生에 있어 大地는 '결정적'인
것 이었다고 재차 밝힌 바 있어요.
자연은 예술적 자질의 원천이였고, 풍경은
예술가로 발전하는 밑거름이었기 때문이예요.
-----
한편 양가의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요인도 작용했어요.조지아의 형제자매
7명모두 강한 예술적 경향을 보였어요.
(매우 드물지만 간혹 미술시장에서
그들의 그림을 볼수 있어요.)
11살때 처음 집에서 미술지도를 받았고,
점차 동생들도 실력이 향상되자 수업을
확대해, 한달에 한번 Sarah Mann사라 만의
집을 방문해 교육을 받았어요.
조지아에게 처음 미적환상을 안겨준건
19세기 최고 석판화 인쇄업자 루이프랑이
제작한 복제화(역사화, 풍경화)를 수록한
책이었어요. 강한 인상을 안겨준 귀리꽃,
붉은 장미송이등 자연물을 모사하기도 했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호사스런 액자에 넣어줬어요.
모친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조지아는
별난 엄마의 행동이 탐탁치 않았지만,
사실 딸의 재능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나름의 애정표현이었어요.
-----
1901년작, 스카프에 긴치마의 여인과
작업복차림의 남자를 그린 연필화가 있는데
아직 어릴때라 미숙한 느낌이 강해요.
(또 언급하겠지만 인물화에 유독 약했어요:)
12살이 되자 예술가가 되겠다는 입장을
가족에게 다시한번 분명히 밝히면서,
스스로 좋아하거나, 아름답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초상화만 그릴거라고 우겼어요.
부모는 딸에게 고집 피우면 앞으로
화가로 먹고살기 힘들다며 회유했어요.
조지아가 남긴 1000여점에 달하는 작품중
초상화는 극히 드문데, 그것마저 대부분
가족을 그린 초상화예요. 그때
고집스런 다짐을 평생 실천한 셈이예요:)
-----
유년시절 다니던 기숙학교에서 미술수업을
담당하던 수녀님은 검고 선한 눈을 가졌지만
워낙 성격이 완고하고 평가기준이 높아
조지아를 주눅들게 했어요. 첫수업시간,
나름 최선을 다해 그렸지만, 그림이
너무 작고 선이 너무 까맣다는 지적을 들었어요.
조지아는 눈물이 핑돌았어요. 대부분 졸작은
없애버렸지만, 그것만은 오래도록 간직했어요.
(수녀님이 손 조각을 가져와 데생을 시킨거예요)
자서전을 통해 75년전 당시를 회상하기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난 절대로! 어떤것도! 너무 작게 그리지
않을거야!" 다짐했었다고 해요 :)
수녀님이 가혹하게 느껴졌겠지만, 결과적
으로는 한걸음 나아가는 계기가 됐어요.
-----
1902년 매디슨고등(공립)학교에 입학했어요.
학교도 마음에 안들고, 조화장식이 달린
모자나 쓰고 다니는 미술선생님은 더 싫었어요..
하지만 여기서 처음 꽃을 면밀히 관찰하게 돼요.
미술수업시간에 식물조사를 하는데, 첫 표본은
진초록과 자주색이 어우러진 천남성이라는
꽃이였어요. 선생님을 꽃잎을 벌려줘 수술도
자세히 들여다 봤어요. 이때 본격적으로 그림에
대한 목표가 생긴 조지아가 벚꽃가지를
작고 옅은 빛으로 표현한 수채화가 전해져요.
조지아가 이무렵 완성한 작품들중, 진실로
창조적이라며 수채화 2점을 꼽은것이 있어요.
하나는 등대가 있는 달빛 어린 해변가에
야자수가 늘어서 있는 낭만적인 작품이고,
또 하나는 그녀의 침실에서 본 바깥 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소복히 눈 쌓인 들판위로
흐르는 달빛과 2그루의 나무를 묘사했어요.
-----
그해 가을, 가족모두 재산을 처분하고 도시
(윌리엄스 버그)로 향했어요. 낭만적이고 낙천적
기질의 아버지는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이런저런 사업이 실패하고 또 병마와 싸우느라
기력이 다했어요. 좀더 상류사회로의 진입을
열망하는 어머니 때문인지 , 대저택을
구입하는데 전재산의 1/4을 썼어요.
그래도 새보금자리에서 마을사람들의 환대를
받진 못했어요.오히려 눈총을 받았죠.
아이들은 중요한 결정때마다 의논없이
통보하는 부모님이 불만이였지만 ,
가족들간 고통스런 침묵은 계속되었어요.
부모님의 습관이 조지아에게 베었는지
그녀도 고통이든 기쁨이든 가족과 친구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사람으로 자랐어요.
전시할 작품을 고를때는 항상 예민했는데,
작품과 습작들중 서랍안에 감춰지고,
작업실 구석구석에 숨겨져
그녀 사후에야 공개된것이 많아요.
-----
유년기는 행복했지만 10대시절을 달랐어요.
13살부터16살까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3개도시의 3군데 학교를 전전했어요.
가세가 기우는 와중에도 조지아를 제외한
아이들 모두 사립학교로 보내졌어요.
조지아가 입학한 채텀 성공회 학교
(Chatham Episcopal Institute)에서의
규제와 통제는 고등학교때 이미
익숙해져서 대수롭지 않았지만,
머리가 자란 조지아는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해 수업을 거부하고 방황했어요.
다행히 미술교사인 교장선생님이
대담하고 오만한 조지아의 미술적재능을
높이 평가해, 넓은 화실도 마련해주는등
특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집안사정때문에 미래가 불안한 마당에
친구들처럼 파티를 즐기지는 못하고,
대신 큰 라일락 꽃송이들과, 붉고 노란
옥수수이삭을 그리며 추억을 만들어갔어요.
(옥수수그림은 좋은 작품으로 뽑혀 학교에
걸렸는데, 졸업후 화재때 소실됐어요.)
채텀에서 9개월을 보내고 여름방학때
집에서 여동생들을 그린 연필 스케치를 보면
여전히 인체를 그리는데 애를 먹고 있어요;;
대신 오렌지, 적포도를 그린 수채화를 보면
색채를 다루는 솜씨가 많이 늘어 있어요.
-----
1905년 편집자로 발탁되어 졸업앨범에
잉크소묘와 만화를 싫었어요.
졸업이 다가오자 여러 친구들이 조지아의
그림이 갖고싶다며 애원하기도 했어요.
딸이 당장 수입을 얻을수 있는 미술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바램대로
시카고 예술대학을 선택했어요. 이유는 전통
있는 기관이기도 했지만, 가까이 외삼촌이 있어
하숙비를 절감할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조지아는 교과과정을 고분히 따랐어요.
남학생들의 짙고 어두운 작품들을 제치고,
섬세하고 엷게 표현한 자신의 석고상
소묘가 칭찬을 받을만큼 두각을 나타냈어요.
하지만, 인체상은 여전히 골치였어요.
그런데 몇달후 반에서 1등을 차지해요.
풀지못했던 난제(인체)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다음편에서 이어갈께요:)
To Be Continued-
어릴때부터 조지아는 꽃, 나무, 돌, 산, 호수,
바다등 자연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었어요.
부모님이 소유한 수십만평의 비옥한 농지에는
봄, 여름이면 야생화가 만개하고,
루비처럼 붉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초록물결 넘실거리는 들판을 수놓았어요.
가을이 지나 폭설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
지평선 끝까지 하얀눈이 소복히 쌓였어요.
몇시간씩이나 흙길을 돌아다녔고
밤이면 침대에 누워 창문너머 펼쳐진
드넓은 하늘을 보다 잠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조지아는 일생동안 갇혀
지내는걸 싫어했어요. 30여년간 동해안을,
다음 50여년은 뉴멕시코 곳곳을 걷고,
또 말과 차를 타고 누볐어요.
그녀의 生에 있어 大地는 '결정적'인
것 이었다고 재차 밝힌 바 있어요.
자연은 예술적 자질의 원천이였고, 풍경은
예술가로 발전하는 밑거름이었기 때문이예요.
-----
한편 양가의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요인도 작용했어요.조지아의 형제자매
7명모두 강한 예술적 경향을 보였어요.
(매우 드물지만 간혹 미술시장에서
그들의 그림을 볼수 있어요.)
11살때 처음 집에서 미술지도를 받았고,
점차 동생들도 실력이 향상되자 수업을
확대해, 한달에 한번 Sarah Mann사라 만의
집을 방문해 교육을 받았어요.
조지아에게 처음 미적환상을 안겨준건
19세기 최고 석판화 인쇄업자 루이프랑이
제작한 복제화(역사화, 풍경화)를 수록한
책이었어요. 강한 인상을 안겨준 귀리꽃,
붉은 장미송이등 자연물을 모사하기도 했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호사스런 액자에 넣어줬어요.
모친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조지아는
별난 엄마의 행동이 탐탁치 않았지만,
사실 딸의 재능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나름의 애정표현이었어요.
-----
1901년작, 스카프에 긴치마의 여인과
작업복차림의 남자를 그린 연필화가 있는데
아직 어릴때라 미숙한 느낌이 강해요.
(또 언급하겠지만 인물화에 유독 약했어요:)
12살이 되자 예술가가 되겠다는 입장을
가족에게 다시한번 분명히 밝히면서,
스스로 좋아하거나, 아름답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초상화만 그릴거라고 우겼어요.
부모는 딸에게 고집 피우면 앞으로
화가로 먹고살기 힘들다며 회유했어요.
조지아가 남긴 1000여점에 달하는 작품중
초상화는 극히 드문데, 그것마저 대부분
가족을 그린 초상화예요. 그때
고집스런 다짐을 평생 실천한 셈이예요:)
-----
유년시절 다니던 기숙학교에서 미술수업을
담당하던 수녀님은 검고 선한 눈을 가졌지만
워낙 성격이 완고하고 평가기준이 높아
조지아를 주눅들게 했어요. 첫수업시간,
나름 최선을 다해 그렸지만, 그림이
너무 작고 선이 너무 까맣다는 지적을 들었어요.
조지아는 눈물이 핑돌았어요. 대부분 졸작은
없애버렸지만, 그것만은 오래도록 간직했어요.
(수녀님이 손 조각을 가져와 데생을 시킨거예요)
자서전을 통해 75년전 당시를 회상하기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난 절대로! 어떤것도! 너무 작게 그리지
않을거야!" 다짐했었다고 해요 :)
수녀님이 가혹하게 느껴졌겠지만, 결과적
으로는 한걸음 나아가는 계기가 됐어요.
-----
1902년 매디슨고등(공립)학교에 입학했어요.
학교도 마음에 안들고, 조화장식이 달린
모자나 쓰고 다니는 미술선생님은 더 싫었어요..
하지만 여기서 처음 꽃을 면밀히 관찰하게 돼요.
미술수업시간에 식물조사를 하는데, 첫 표본은
진초록과 자주색이 어우러진 천남성이라는
꽃이였어요. 선생님을 꽃잎을 벌려줘 수술도
자세히 들여다 봤어요. 이때 본격적으로 그림에
대한 목표가 생긴 조지아가 벚꽃가지를
작고 옅은 빛으로 표현한 수채화가 전해져요.
조지아가 이무렵 완성한 작품들중, 진실로
창조적이라며 수채화 2점을 꼽은것이 있어요.
하나는 등대가 있는 달빛 어린 해변가에
야자수가 늘어서 있는 낭만적인 작품이고,
또 하나는 그녀의 침실에서 본 바깥 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소복히 눈 쌓인 들판위로
흐르는 달빛과 2그루의 나무를 묘사했어요.
-----
그해 가을, 가족모두 재산을 처분하고 도시
(윌리엄스 버그)로 향했어요. 낭만적이고 낙천적
기질의 아버지는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이런저런 사업이 실패하고 또 병마와 싸우느라
기력이 다했어요. 좀더 상류사회로의 진입을
열망하는 어머니 때문인지 , 대저택을
구입하는데 전재산의 1/4을 썼어요.
그래도 새보금자리에서 마을사람들의 환대를
받진 못했어요.오히려 눈총을 받았죠.
아이들은 중요한 결정때마다 의논없이
통보하는 부모님이 불만이였지만 ,
가족들간 고통스런 침묵은 계속되었어요.
부모님의 습관이 조지아에게 베었는지
그녀도 고통이든 기쁨이든 가족과 친구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사람으로 자랐어요.
전시할 작품을 고를때는 항상 예민했는데,
작품과 습작들중 서랍안에 감춰지고,
작업실 구석구석에 숨겨져
그녀 사후에야 공개된것이 많아요.
-----
유년기는 행복했지만 10대시절을 달랐어요.
13살부터16살까지 집에서 멀리 떨어진
3개도시의 3군데 학교를 전전했어요.
가세가 기우는 와중에도 조지아를 제외한
아이들 모두 사립학교로 보내졌어요.
조지아가 입학한 채텀 성공회 학교
(Chatham Episcopal Institute)에서의
규제와 통제는 고등학교때 이미
익숙해져서 대수롭지 않았지만,
머리가 자란 조지아는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해 수업을 거부하고 방황했어요.
다행히 미술교사인 교장선생님이
대담하고 오만한 조지아의 미술적재능을
높이 평가해, 넓은 화실도 마련해주는등
특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집안사정때문에 미래가 불안한 마당에
친구들처럼 파티를 즐기지는 못하고,
대신 큰 라일락 꽃송이들과, 붉고 노란
옥수수이삭을 그리며 추억을 만들어갔어요.
(옥수수그림은 좋은 작품으로 뽑혀 학교에
걸렸는데, 졸업후 화재때 소실됐어요.)
채텀에서 9개월을 보내고 여름방학때
집에서 여동생들을 그린 연필 스케치를 보면
여전히 인체를 그리는데 애를 먹고 있어요;;
대신 오렌지, 적포도를 그린 수채화를 보면
색채를 다루는 솜씨가 많이 늘어 있어요.
-----
1905년 편집자로 발탁되어 졸업앨범에
잉크소묘와 만화를 싫었어요.
졸업이 다가오자 여러 친구들이 조지아의
그림이 갖고싶다며 애원하기도 했어요.
딸이 당장 수입을 얻을수 있는 미술교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바램대로
시카고 예술대학을 선택했어요. 이유는 전통
있는 기관이기도 했지만, 가까이 외삼촌이 있어
하숙비를 절감할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조지아는 교과과정을 고분히 따랐어요.
남학생들의 짙고 어두운 작품들을 제치고,
섬세하고 엷게 표현한 자신의 석고상
소묘가 칭찬을 받을만큼 두각을 나타냈어요.
하지만, 인체상은 여전히 골치였어요.
그런데 몇달후 반에서 1등을 차지해요.
풀지못했던 난제(인체)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다음편에서 이어갈께요:)
To Be Continued-
ARTIST MATERIALS, GEORGIA O’KEEFFE
MUSEUM RESEARCH CENTER LIBRARY
STONES AND PIECES OF WOOD ON BLACK PLATE
PAINTING MATERIALS, GEORGIA O’KEEFFE
MUSEUM RESEARCH CENTER LIBRARY
PEDERNAL
SKY ABOVE THE FLAT WHITE CLOUD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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